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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일 밤 10시 무렵 서울동부지법 내 유일하게 불이 켜진 301호 대법정. 피고인석에 선 말쑥한 차림의 대학생 구모(25)씨가 책가방 안에서 꼬깃해진 A4 종이 한 장을 꺼내 '최후 변론'을 시작했다. "우선 피해자분들에게 진심으로 죄송하다"며 입을 뗀 그는 부모 이야기를 할 때마다 새어나오려는 울음을 끅끅 삼켰다. "그동안 절 뒷바라지해주신 부모님께 꼭 보답하고... 보람을 안겨드리고 싶습니다. 부디 저에게 그런 기회를 주시기를, 배심원 여러분께 부탁드립니다."
구씨는 보이스피싱 조직의 범행에 가담한 혐의(통신사기피해환급법 위반)로 이날 국민참여재판을 받았다. 피해자들을 만나 직접 돈을 받고 이를 조직에동양종금CMA체크카드
게 전달하는 이른바 '수거책'이었다. 부모에게 손 벌리지 않으려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하며 배우의 꿈을 품어온 구씨가 어쩌다 범죄자가 됐을까. 14시간 가까이 심리한 국민 배심원 8명(예비 배심원 1명)과 재판부는 20대 청년에게 어떤 벌을 내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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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티이미지뱅크


사건이 발생한 지난해 6월 구씨는 서울 강남구의 한 고급 해산물 뷔페에서 일했다. 얼마 전 한 연예기획사와 전속 계약을 맺고 조만간 드라마 단역으로 데뷔할 날을 앞둔 시점이었다. 2학기가 시작되고 연기와 학업을 병행하려면릴게임횡금성
돈이 더 필요했다. 구씨는 평소 아르바이트 일자리를 구할 때 사용하던 모바일 애플리케이션(앱)에 공고를 올린 업체들 중 광진구에 있는 자신의 자취방과 가까운 몇 군데에 문의를 남겨놨다.
그중엔 자칭 '코인 거래 업체' A업체도 포함돼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직원이 카카오톡을 통해 말을 걸어왔다. "현금을 받아 코인으로 교환해 주는 '오리지널 바다이야기
장외 거래 전문' 회사"라고 소개한 그는 거래 1건당 15만~30만 원을 지급하며, 오가는 교통비도 전액 지원한다고 했다. 코인에 익숙지 않은 구씨는 자신의 실수로 돈이 오배송되는 배달 사고라도 날까 봐 두려웠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겠다"고 답한 뒤 유튜브를 켜 '코인 장외 거래' 등을 검색했다. 영상을 보고 오프라인 거래가 실제로 활발히 이뤄진다고 판통화쌍
단한 구씨는 식당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이 일을 시작하기로 했다.
같은 해 7월 약 2주간 구씨는 전북 군산 등 전국 각지에서 7명을 만나 10차례에 걸쳐 1억1,000여만 원을 받았다. 텔레그램으로만 소통하던 직원은 거래할 때마다 '가명'을 쓰게 하는 등 수상쩍은 지시를 내렸다. 하지만 구씨는 별다른 의심 없이 그들이 알려주는 계좌로 거래 대금을 입금하거나, 소개해준 '업자'를 거쳐 가상 화폐로 환전해 보냈다. 그 대가로 총 200여만 원을 챙겼다.
직원이 일러준 대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자신 명의로 빌린 렌터카를 타곤 했던 그는 경찰에 꼬리를 잡혔다. 회사라고 믿었던 A업체는 사실 저금리 대환대출을 해 주겠다며 접근한 뒤 수수료 명목으로 돈을 뜯어내는 보이스피싱 조직이었다.

"모를 수 없다" vs "알고도 할 리 없다"
재판에 넘겨진 구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국민참여재판은 피고인이 신청할 경우 열리며 지방법원 관할 지역에 사는 20세 이상 주민 중 무작위로 선정한 배심원들이 재판에 참여해 유·무죄를 평결하는 제도다. 배심원 평결과 양형 의견은 법적 구속력은 없지만 재판부는 선고에 참작한다.
재판의 쟁점은 구씨가 이 일이 범죄인지 알고 가담했는지 여부였다. 검찰과 구씨 변호인 양측은 수십 쪽 분량의 프레젠테이션(PPT)을 통해 이 사건 공소 사실과 죄명 및 적용 법조, 입증 계획 등을 배심원단에게 조목조목 설명하고, 서로의 주장을 반박하며 공방을 벌였다.
검찰은 범행 공모와 미필적 고의가 모두 인정된다며 징역 3년 6개월을 구형했다. △업무 강도와 난이도가 높지 않은데 고액을 지급한다고 했고 △지시를 내리는 회사 직원과 단 한 번도 대면하지 못했고 △보이스피싱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아진 지 오래이니 이 아르바이트가 범죄에 연루됐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반면 변호인 측은 무죄를 내려달라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배우가 될 날이 머지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이자 같은 배우 지망생인 친구에게 "용돈이 필요하면 이런 아르바이트를 한 번 찾아보라"고 말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보이스피싱에 가담되는 걸 알고도 이렇게 행동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또 피해자 7명 중 4명과 합의한 뒤 처벌 불원서를 받았고, 인적사항을 모르는 나머지 3명에겐 공탁금을 건넸다는 점도 강조했다.
2시간가량 평의를 거친 배심원단 7명은 만장일치로 유죄 의견을 내고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집행유예 여부에 대해서도 모두 찬성했다. 재판부는 구씨에게 징역 1년 6개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유죄가 내려지긴 했지만 보이스피싱 범죄에 대한 엄격한 처벌 기조를 고려하면 이례적인 결과라는 분석도 나온다. 실제 대법원의 지난해 '사법연감'에 따르면 1심 선고 기준 보이스피싱 범죄 1,551건 중 집행유예로 실형을 피한 건 275건으로 약 17% 정도였다. 재판부는 "(구씨가) 적어도 자신의 행위가 보이스피싱 범행의 일부에 해당한다는 점을 미필적으로나마 인식, 예견하였음에도 이를 용인하면서 가담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면서도 "이런 범죄 조직의 실체와 구조, 자신의 역할 등을 확정적으로 인식한 상태에서 범행에 가담한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판시했다.
최현빈 기자 gonnaligh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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