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도 많은 아르헨티나 국민의 마음속에 살아 숨 쉬고 있는 전설의 영부인 에바 페론(1919~1952). 그녀를 향한 세상의 평가는 여전히 논쟁적이다. 숱한 남성의 지위를 발판 삼아 신분 상승의 꿈을 이룬 신데렐라인가. 아니면 가난한 아르헨티나 민중에게 희망을 심어준 구원자인가.



아르헨티나 영부인 에바 페론(배우 유리아 분)의 장례식으로 시작되는 뮤지컬 '에비타'./ 사진=블루스테이지


지난 11일 서울 강남구 광림아트센터 야마토통기계 BBCH홀에서 정식 개막한 '에비타'는 아르헨티나의 '영원한 국모'로 추앙받는 에바 페론(1919~1952)의 삶을 다룬 전기 뮤지컬이다. 1970년대 말 영국 웨스트엔드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에 성공했고 1980년 토니상 7관왕을 휩쓸었다. 국내에선 2006년 초연, 2011년 재연 이후 이번이 세 번째 무대다.
작품은 서른셋의 짧은 릴게임한국 생을 마친 에바 페론의 부고에서 시작한다. 혼외자로 태어난 그는 아무런 기반 없이 성공을 향한 일념 하나로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로 향한다. 그곳에서 자신을 더 나은 삶으로 이끌어 줄 수많은 남성과 교제하며 라디오 성우, 배우 등의 자리를 꿰찬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자선 행사에서 24살 연상의 육군 대령 후안 페론을 운명적으로 만난다. 이때부터 '킹 메 릴게임오션파라다이스 이커' 역할을 자처한 에바 페론은 대중을 사로잡는 화술과 빈민층 출신이라는 유대감을 바탕으로 압도적 지지를 받으며 영부인이 된다. '에비타'라는 애칭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었다.
'에비타'는 실존 인물을 무대 위로 불러낸 최근 여성 전기 뮤지컬의 연장선에 있지만 결은 사뭇 다르다. 뮤지컬 '마리 퀴리'는 폴란드 여성 과학자 퀴리 부인의 집 사아다쿨 념에, 뮤지컬 '프리다'는 온갖 역경에도 끝내 붓을 놓지 않았던 멕시코 여성 화가 프리다 칼로의 예술혼에 초점을 맞추며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을 부각했다. 이에 반해 에바 페론은 누구보다 큰 야망을 가졌지만, 자신의 당당한 실력이 아닌 남성의 지위를 이용해 정상에 오른 인물로 그려진다. 극 중 해설자 '체'가 에비타를 비판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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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에비타'에서 에바 페론의 삶을 논평하는 해설자 체 역의 배우 김성식./사진=블루스테이지


에비타가 오늘날 시대적 감수성에 어울리는 인물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극에 몰입할 수 있는 건 배우들의 열정적인 노래 덕분이다. 대사 없이 노래로만 구성된 성 스루 뮤지컬임에도 지치지 않고 노래를 이어간다. 특히 에비타 역 배우의 폭발적인 성량과 앙상블의 에너지가 무대를 꽉 채운다.
뮤지컬 음악계의 세계적 콤비인 팀 라이스(작사)와 앤드루 로이드 웨버(작곡)가 쓴 곡을 직접 감상할 수 있는 황홀한 무대다. 잔잔하게 시작해 갈수록 장엄해지는 '아르헨티나여, 날 위해 울지 말아요'(Don't Cry for Me Argentina), 행진곡처럼 웅장한 '뉴 아르헨티나'(New Argentina), 성스러운 멜로디의 '산타 에비타'(Santa Evita) 등 각기 다른 매력의 곡들이 이어진다.



뮤지컬 '에비타'에서 에바 페론 역을 맡은 김소향(오른쪽)과 후안 페론 역 윤형렬. 에바 페론이 후안 페론의 대통령 당선 이후 기념 연설을 하고 있다./사진=블루스테이지


무대 연출도 새롭다. 후안 페론이 대통령에 당선된 2막 첫 장면에선 발코니에 오른 에비타가 객석 코앞까지 다가오는데 마치 아르헨티나 국민이 된 듯한 기분으로 그의 노랫소리에 빨려 들어간다. 이외에도 흑백영화와 같은 스크린 활용, 다채로운 조명 연출이 이색적이다.
작품은 이른바 '페론 시대'의 명암을 골고루 짚어준다. 비자금 의혹, 언론 탄압 등의 그림자와 빈민층 구호, 여성 참정권 확대와 같은 에비타의 성과를 함께 조명한다. 배우의 해석에 따라 에비타에 대한 시선이 갈릴 듯하다.
'에바 페론' 역은 배우 김소현과 김소향, 유리아가 맡았다. 해설자 '체'는 마이클리·한지상·민우혁·김성식이 소화한다. 에바 페론의 남편인 아르헨티나 대통령 '후안 페론' 역은 손준호·윤형렬·김바울이 연기한다. 공연은 내년 1월 11일까지 이어진다.
허세민 기자